스포일러 천지임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2011)
감독 토마스 알프레드슨
각본 브리짓 오코너, 피터 스트로건
원작 존 르 카레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출연 게리 올드만, 베네딕트 컴버배치, 콜린 퍼스, 마크 스트롱, 존 허트, 토비 존스,
키어런 하인즈, 데이빗 덴식, 톰 하디, 캐시 버크

스마일리, 조지 스마일리
영국 비밀 정보국('서커스')요원인 조지 스마일리를 빼고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포함한 존 르 카레의 '칼라' 삼부작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중 BBC TV 시리즈로 각색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에서 알렉 기네스의 조지 스마일리는 심지어 원작의 스마일리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겨, 스마일리는 곧 기네스라는 공식이 생겼다. 그런데 이 TV 시리즈보다 더 모호하지만 날카롭고, 더 차갑지만 감정의 깊이를 더 파고드는 토마스 알프레드슨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게리 올드만의 조지 스마일리를 위한 영화, 즉 그의 이야기다.
언뜻 기네스의 스마일리와 올드만의 스마일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 둘 다 단색 위주의 오버코트와 알 큰 안경을 착용한 것 외에 별 특징이 없어 길가다 마주쳐도 지나치기 쉬운 외모에다 자신의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수사를 할 때 조용히 관련된 사람들을 한 명씩 만나며 추리하는 작업방식도 마찬가지다. 과연 매력을 온몸에 휘감고 스피드 보트를 타며 적을 좇는 제임스 본드와는 정반대다. 해서 스마일리의 별명은 안티 제임스 본드다.
다만 기네스의 스마일리는 클로즈업으로 자주 표정 변화를 보이는데 비해, 올드만의 스마일리는 클로즈업으로 뒷모습을 자주 보이고, 그나마 그의 얼굴이 화면을 채울 때도 뒷모습을 보는 것과 별다르지 않다. 뒤통수든 얼굴이든, 올드만의 스마일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관객이 얻을 수 있는 정보 차이가 거의 없다는 말이다. 그만큼 올드만의 스파이는 기네스의 스파이보다 더 과묵하고 의중을 알 수 없다. 한데 재밌는 점은,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런 올드만의 스마일리가 어떤 습관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하루를 보내는지 등을 더 잘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고개를 천천히 슬쩍 돌린다든지, 감정적으로 동요할 때 손가락으로 안경을 올린다든지, 생각이 필요할 때 길을 걷거나 수영을 한다든지.
게다가 이야기 대부분이 스마일리 시점에서 진행된다. 이따금 중요한 장면이 스마일리를 보조하는 피터 길럼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점을 제외하면, 다른 인물의 플래시백조차 스마일리와 함께 대화할 때만 나온다. 영화는 스마일리 시점에서 문제해결 줄기를 따라가며 스마일리를 관찰하기도 한다. 그래서 올드만이 분한 스마일리의 행위와 동기가 이중간첩 색출이란 중심 사건에 종속되기보다, 그는 특정 시대, 특수 세계에 존재하는 것 자체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인물이다. 한 마디로 영화는 첩보물 외피를 쓴 스마일리 중심의 인물 연구에 가깝다. 이는 스마일리에 국한되지 않는다. 영화는 스마일리처럼 첩보계를 사는 주변 인물들 심리를 파고드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모자이크
이중간첩 색출, 이른바 '두더지 잡기'를 중심으로 얽히고설킨 이야기 타래를 풀어가는 동시에 인물 탐구도 겸한다니. 관객은 물론 작가도 자칫하면 길 잃기 쉬운 설정이다. 여기다 사건 배경, 인물의 사정 및 심리 묘사를 위해 플래시백도 삽입하자니,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픈 작업이 아닐 수 없다. 복잡한 구조에 암시 투성인 르 카레의 원작부터가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데, 이를 두 시간 영상으로 압축해 중심을 잃지 않는 이야기를 구축한다니, 불가능한 소리 같다.
그런데 브리짓 오코너와 피터 스트로건은 원작의 방대한 이야기를 좀 더 작은 조각들로 토막낸 후 재조합해, 원작이나 TV 시리즈와 차별되며 영화 매체에 적합한 서사 구조를 만들었다. 원작/TV 시리즈와 달리, 영화는 정보국 내 권력 이동을 한 눈에 보여주는 수미상관 구조를 취하고, 인물 간 관계를 함축하며 음울한 현재(영화상)와 대비되는 ‘좋았던 한때’를 나타내는 크리스마스 파티 플래시백을 포함한다. 큰 그림을 따지면 이렇다. ‘두더지 잡기’라는 큰 이야기 줄기가, 전(前)정보국장 컨트롤의 사퇴 계기가 된 테스티파이(Testify) 작전과 라이벌인 퍼시 앨러라인을 새 정보국장으로 앉히는 위치크래프트(Witchcraft) 작전과 맞물려 이어진다.
이렇게 재배열된 영화상 서사는 다시 몇 개의 덩어리로 나뉘는데, 각 덩어리는 얼추 스마일리의 수사 전개 단계이기도 하고 나름 주제를 가지기도 한다. 즉, 테스티파이 작전 실패와 서커스 내 기성세대(컨트롤, 스마일리)의 퇴장—정보를 가진 리키 타르의 등장과 스마일리의 수사 시작—스마일리와 길럼의 수사 진행—타르가 정보를 얻게 된 사연과 스마일리와 길럼의 사적인 이면—계속되는 수사—덫을 놓는 스마일리와 위치크래프트와 이중간첩의 정체—스마일리의 서커스 복귀로 나눌 수 있다. 임의적이긴 하지만.
그런데 여기에 위치크래프트를 소개하는 장면과 앞서 말한 크리스마스파티 장면이 플래시백으로 들어가고, 중간중간 위치크래프트의 양면을 보여주는 장면도 삽입되기 때문에, 영화는 정갈한 틀 속에 비선형적 서사를 갖춘다. 이제 중요한 건, 그렇게 사이사이에 배치된 여러 삽입 장면이 '두더지 잡기' 메인 플롯에 어떻게 녹아드느냐다.

단서
일정한 구조를 갖춘 이 모자이크식 서사에 리듬을 부여하고 흐름을 해치지 않기 위해, 장면전환을 알리는 여러 가지 큐(cue) 또는 단서가 반복적으로 쓰인다. 풀어야 할 게 많은 서사에 반복이라니. 대담하기 짝이 없다. 영화는 장면전환 뿐 아니라, 유사 구도나 장면을 반복해 규칙적이면서 조금씩 엇나간 이중적인 리듬을 연출하고, 특정 단서를 강조해 관객이 이야기 끈을 놓지 않도록 한다.
가장 중요한 단서는 다름 아닌 영화 제목이다. 영국 동요 "팅커 테일러"에서 따온 팅커, 테일러, 솔저, 푸어맨, 배거맨은 각각 컨트롤이 제시한 용의자를 가리킨다. 팅커는 퍼시 앨러라인, 테일러 빌 헤이든, 솔저 로이 블랜드, 푸어맨 토비 에스터헤이지, 그리고 배거맨 조지 스마일리. 컨트롤은 이들 사진을 각각 다른 체스 말에 붙여 넣는다. 캐슬은 퍼시 앨러라인, 비숍은 빌 헤이든. 그리고 블랙퀸 조지 스마일리. 이후 스마일리 책상 위에 스마일리의 네메시스 '칼라'의 이름이 붙여진 화이트퀸이 클로즈업된다. 그리고 좀 더 나중에 스마일리는 또 다른 비숍에 러시아 수행원인 폴리야코프의 사진을 붙인다. 이렇게 체스 말을 짧게 반복, 삽입하여 용의자에 대한 단서를 강조한다.
또 컨트롤의 명으로 부다페스트에 갔다가 총 맞고 쓰러진 짐 프리도의 모습은 어떤가.그의 쓰러진 모습은 오프닝 시퀀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데, 이는 스마일리가 프리도를 언급하거나 이후 프리도 본인이 등장하기 직전에 총소리와 함께 반복된다. 게다가 이 장면은 이중간첩의 말로에 대한 복선이기도 하다. 그 외에 '두더지'가 진짜 정보—보물—를 폴리야코프에게 전달하는 장면이 나오기 전마다, 파일 담긴 승강기가 올라가는 쇼트와 개 짖는 소리가 단서 역할을 한다. 그런가 하면, 플래시백 전환도 스마일리 시점에서 혹은 스마일리와 이야기하는 인물 시점에서 이루어져 혼란을 방지한다. 이때 과거와 현재는 스마일리의 다른 안경만으로도 쉽게 구분된다. 이렇듯 삽입 장면은 많지만, 반복적이고 일관된 큐로 장면 사이가 매끄럽게 연결되는 것이다.
<팅커 테일러>에서 장면 반복은 관객에게 이야기 흐름을 상기시키기도 하지만, 리듬을 만들고 별다른 대사 없이도 스마일리를 묘사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중간 중간 짧게 몇 번 들어가는 스마일리의 걷는 장면과 수영하는 장면, 스마일리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 장면들, 올드만이 만들어 낸 스마일리의 매너리즘 등은 일정한 패턴을 이루면서 스마일리에 대한 정보의 깊이를 더하는 셈이다. 특정 단서의 반복적인 등장은 일정한 리듬 뿐 아니라, 점증적 리듬을 연출하기도 한다. 리키 타르의 녹음된 목소리가 일례다. “서커스가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건 전부 똥에 불과해 (Everything the Circus thinks is gold is shit).” 이 대사는 영화 중반에 스마일리, 길럼, 타르 등이 모인 곳에서 배경의 일부로 흐릿하게 들린다. 그러다 스마일리가 위치크래프트의 정체를 추리하는 과정에서 점점 더 또렷하고 크게 반복된다.
영화의 리듬에 기여하는 건 촬영 방식도 마찬가지다. 언뜻 전반적으로 정적인 영화지만, 그렇다고 카메라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일부 장면은 집중하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흡사 뱀처럼 인물에 서서히 미끄러지듯 피사체에 근접(push-in)/줌인하거나, 클로즈업한 인물에서 천천히 멀어지거나, 아니면 인물의 움직임이나 인물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팬하거나 트래킹한다. 미끄러지듯 느리게 뒤로 당기거나 줌인하는 카메라 움직임으로 리듬은 물론 긴장을 자아낸다. 거의 매 장면에서 이 스파이들이 살던 때를 상기하기라도 하듯 줌의 반복이다. 그러면서도 정지된 화면에서 초점 이동이라든지, 같은 장소의 경우 앵글 변화로 지리한 반복을 피한다. 가령, 서커스의 고위 간부들이 소개되는 장면이나, 스마일리 시점에서 용의자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스쳐가는 장면이 그렇다. 또 초반 서커스의 설정 쇼트가 로우 앵글에서 줌인된다면, 이후 서커스를 비출 때는 조감 쇼트로 내려다 보는 식이다.
이러한 특정 장면 또는 소리를 통한 매끄러운 연결이나 카메라 움직임의 리듬 외에, 불필요한 대사 생략 또한 각색과 편집의 효율성을 더한다. 보통 여러 겹의 서사는 설명적 대사로 점철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여기엔 스마일리의 모놀로그나 플래시백 정도를 빼면 대사가 많지 않다. 적지만 그 쓰임이 매우 경제적이다. 예를 들어, 오프닝 크레딧 다음에 나오는 시퀀스는 올리버 레이컨, 리키 타, 피터 길럼 등 주요 인물을 소개하는 동시에 사건 발단을 알린다. 이 시퀀스는 짧지만 효율적인 대사로 깔끔히 구성돼 있다. 즉, 간첩 정보를 가지고 있는 타르가 정부 관료인 레이컨에게 전화해 자신의 상사인 길럼을 언급하면, 카메라는 바로 정보국으로 향하는 길럼으로 커트한다. 이후 길럼은 레이컨의 전화를 받는데, 이때 간첩 설명은 되풀이되지 않고 레이컨의 목소리는 배경으로 처리된다. 그 직후 집에 있는 스마일리로 커트해, 다른 불필요한 장면이나 설명 없이 문 두드리는 소리만 들린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길럼과 스마일리가 레이컨에게 가는 식이다. 그 외에 부다페스트, 이스탄불, 파리 등 다양한 장소를 소개할 때도, 불필요한 자막 대신 이전 장면에서 해당 장소를 언급하거나 배경 소리 등으로 단서를 제공한다.

흐린 가을
영화는 컨트롤이 짐 프리도에게 이중간첩의 존재를 알리는 장면과, 그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부다페스트에 간 프리도의 장면이 교차되며 시작된다. 컨트롤이 '썩은 사과'와 '보물'을 언급하고 이어지는 장면은, 구름에 잠겨 우중충하고 단조로운 갈색 지붕으로 가득한 부다페스트 전경이다. 그리고 바로 카메라가 뒤로 미끄러지며 웃는 아이들의 역광 실루엣을 드러낸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서커스 내부도 모노톤 그 자체다. 카메라가 서커스를 떠나는 컨트롤과 스마일리를 따라 체크무늬 방음벽의 회의실을 나오면, 낮은 천정 아래 촘촘히 배치된 책상과 무채색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한 아래층이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 이윽고 문을 나서면, 우중충한 런던 거리다. 그 후 교차되는 새로운 서커스의 일상과 은퇴한 스마일리의 일상도 비슷한 색으로 일관된다. 그리고 카메라는 인적이 뜸하고 안개가 잔뜩 낀 거리를 걷는 스마일리를 담는다.
앞서 말했듯, 이 영화는 조지 스마일리의 이야기다. 그래서인지 영화 내내 깔린 차갑고 부연 공기가 스마일리로 체현된 것처럼 느껴진다. 매 장면마다 슬그머니 다가가 천천히 수평 방향으로 그 장면을 훑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스마일리의 그것처럼 보인다. 매 장면을 지배하는 단조로움과 단색은 스마일리가 입는 옷에도 나타난다. 매 프레임의 일부를 구성하는 모호하고 불투명한 이미지들과 격자를 연상시키고 편집증적으로 질서적인 이미지들은 스마일리가 몸담은 첩보계를 암시하기도 한다. 꿰뚫어볼 수 없는 스파이들, 형체 없는 보물과 쭉정이, 그런 쭉정이에 사활을 거는 야심가, 그리고 허식과 부패로 대변되는 관료주의적 조직 생리 등. 그래서 이 영화는 스파이들과 그들이 사는 세계를 잠식한 흐린 공기와 앞서 말한 이미지들이 함께 유기적으로 일궈낸 감각적 경험의 총체다.

배신
서커스, 나아가 런던을 감도는 냉담하고 권태로운 분위기는 어떤가. 영화 속 첩보계는 TV 시리즈보다 더 냉혹하다. 토마스 알프레드슨이 재현한 서커스는 TV 시리즈의 서커스보다 더 폐쇄적이고 건조하다. 가령 서커스의 회의실엔 바깥 소음이 들리기는커녕 창문 하나 없다. 곧 살인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밀실과 같다. 이 삭막함과 냉혹함의 근원은 무엇이고, 영화 속 스마일리가 회상하는 '좋았던 그때'는 언제 어디로 사라진 걸까?
그런데 이중간첩의 정체가 밝혀지기도 전에, 스마일리가 두 번째로 크리스마스 파티를 떠올릴 때 즈음 그 좋았던 날마저 거짓으로 드러난다. 칼라를 만났던 일에 대한 스마일리의 모놀로그와 후반 이중간첩의 고백에 따르면, 그의 아내 앤의 존재는 그의 약점이기도 하다. 스마일리의 전 동료였던 코니 삭스가 더럽히고 싶지 않은 좋았던 그때는 이미 스마일리에겐 아내와 친구의 배신으로 얼룩졌던 것이다. 그런데 서커스의 좋았던 시절 그대로 기억하고 싶어 하는 코니 삭스도 충성을 다했던 조직으로부터 해고되지 않았던가. 그리고 컨트롤은 라이벌인 퍼시 앨러라인과 수배자 신세에서 구해 줬던 토비 에스터헤이지 등에게 배신당한다.
피터 길럼도 예외는 아니다. 두더지를 덮었던 그림자가 걷힐 때, 동료로 여기던 자가 이중간첩이란 사실에 믿을 수 없다는 길럼의 표정이 화면을 채운다. 이 안티클라이맥스적인 클라이맥스에서, 카메라는 스마일리가 아닌 길럼의 시점을 따른다. 스마일리의 경우, 그가 폴리야코프 사진을 이중간첩과 같은 체스 말에 붙였을 때 이미 어렴풋이 간첩이 누군지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일 게다. 그러면 리키 타르는? 서커스 내 가장 낮은 서열에 자리한 그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조직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지만, 결국 변절자란 딱지가 붙어 도망이나 다니는 신세다. 마지막으로 말할 것도 없이, 친구이자 연인의 배신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던 짐 프리도. 그가 가진 배신감은 죽을때까지 트라우마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스마일리가 이중간첩을 찾아간 장면에서, 영화는 그 누구보다 먼저, 또 가장 오래도록 배신감에 사로잡힌 이는 다름 아닌, 간첩 본인임을 암시한다. 원작 소설과 TV 시리즈에서 빌 헤이든은 구구절절 변절의 이유를 설명한다. 그렇지만 영화 속 헤이든은 한 두 마디만 내뱉는다. 어느 쪽이든 선택해야 했고, 그건 도덕적인 선택이기도 했지만 미적인 선택이기도 했다고 말이다. “서구는 이제 너무 추해졌어.” 아티스트이기도 한 헤이든을 무엇보다 잘 나타내는 한 마디다. 자신이 굳게 믿던 이념, 그리고 그 이념 하에 지구 반대편에서 학살을 일삼는 체제의 모순, 그 간극에 빌 헤이든은 배신감을 가졌던 걸까. 상기했듯 영화는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늘어놓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짧은 마지막 한 두마디는 그가 변절한 이유를 효과적으로 함축한다.
오프닝 크레딧을 마무리하는 쇼트에서 벽에 걸린 그림을 지긋이 바라보던 스마일리를 상기해 보자. 액자 속 화면을 빈틈없이 채운 직사각형들. 카메라는 처음에 그림 위에 머물렀다가 점차 뒤로 물러나며 이를 바라보는 스마일리의 뒷모습을 드러낸다. 이 그림은 나중에 스마일리의 플래시백에서 드러나듯, 헤이든이 앤에게 주려고 놓고 간 추상화다. 이처럼 영화는 이중간첩에 대한 단서와 복선을 찬찬히 못질하듯 반복한다.
아마 냉전 시대의 비밀 정보국은 알프레드슨이 표현하는 것처럼 그렇게까지 삭막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서커스 바깥 세상도 저렇게까지 냉랭하고 건조하고 텁텁하지 않았을 것이다. 원작에는 비틀린 유머가 짙게 깔려 있고 TV 시리즈 속 서커스도 복작거리는 사거리 한복판에 위치해 있다. 그렇지만 두 시간짜리 영화로 모든 이야기를 압축하면서, 알프레드슨은 스마일리를 비롯한 스파이들과 그들의 관계 저변에 깔린 정서—이중성과 배신—를 흐린 가을과 숨막히는 분위기로 표면화하는 데 집중한다.

다시, 스마일리
반복컨대 <팅커 테일러>는 스마일리의 영화다. 원작이나 TV 시리즈보다 더 스마일리의 시점을 강조한다. 길럼의 시점을 따르는 부분이나 짐 프리도가 나오는 부분 정도만 제외하면, 대부분 스마일리 혼자 추리하고 과거를 회상하거나 스마일리와 다른 이가 함께 한 자리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등 카메라가 스마일리와 함께 사건을 따라가거나 스마일리를 관찰하는 식이다. 원작이나 TV 시리즈보다 더 스마일리에 집중하기 위해, 오코너와 스트로건은 리키 타르가 간첩 정보를 어떻게 얻었는지 설명하는 부분을 스마일리와 일대일로 대화하는 장면에서 시작하도록 각색했다. 토비 에스터헤이지로부터 위치크래프트가 몰래 진행되는 장소를 알아낼 때도, 스마일리와 토비가 일대일로 대면한다. 이러한 장면들에서 카메라는 타르나 에스터헤이지를 유심히 바라보는 스마일리에 머물곤 한다.
특히 스마일리의 모놀로그는 영화가 TV 시리즈보다 스마일리 시점에 더 무게를 두고 있음을 잘 나타낸다. TV 시리즈에서는 스마일리가 칼라와 대면하는 장면을 플래시백으로 넣는다. 영화의 경우, 이미 플래시백이 꽤 들어갔기 때문에 더 이상의 회상 장면은 혼란을 가져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구조상 이유도 있겠지만, 스마일리가 칼라에게 변절하라고 설득했던 과거를 모놀로그로 처리한것은 스마일리 시점을 강조하는 영화의 목적에도 부합한다.
엄격하게 따지면 모놀로그라기보다 스마일리가 길럼에게 털어놓는 식이다. 그렇지만 원작이나 TV 시리즈와는 달리, 길럼은 스마일리와 좀 떨어진 곳에 앉고, 대신 테이블 너머 스마일리를 마주하는 것은 빈 의자다. 여기서 카메라는 빈 자리와 스마일리를 한 프레임에 넣어 칼라의 존재를 강조한다. 그런데 심문 당시 칼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데다, 스마일리는 칼라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비어 있는 것 같지만 너무나 명백히 실재하는 자신의 적, 반대편의 이념광이자 자신의 얼터 에고이기도 한 이중적인 칼라를, 스마일리를 마주한 빈 자리만큼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아내 앤 또한 뒷모습이나 흐릿한 배경으로 처리된다. 예를 들어, 스마일리가 앤의 배신을 떠올릴 때도 관객은 스마일리의 눈을 따른다. 아내와 친구의 배신을 납득하기 어려운 스마일리의 심정은 카메라가 배신자들의 얼굴을 비추지 않는 것으로 대변된다. 게다가 앤이 나오는 플래시백도 코니 삭스가 앤을 언급하고 나서야 나온다. 스마일리에게 칼라나 앤(의 배신)은 각각 그가 충성하는 체제의 약점과 그의 개인적인 약점을 상징하므로 애써 기억하고 싶지 않은 존재인 것이다.
이 긴 여정은 결국 스마일리의 승리로 끝나는 듯하다. 두더지도 잡았고, 앤도 돌아왔고, 서커스에도 복귀하니 말이다. 그렇지만 컨트롤의 죽음, 돌이킬 수 없는 동료의 배신과 죽음 뒤에 스마일리가 정말 마지막에 웃는 자인지 확신하기 어렵다. 서커스, 정확히는 컨트롤의 자리로 돌아온 스마일리를 반기는 것은 아무도 없는 서커스 회의실, 그리고 모두가 함께 취해 웃던 시절에 들었던 노래의 말미를 장식하는 공허한 박수갈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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